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화민국 국민정부 (문단 편집) === [[난징]] 국민정부(훈정 2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장제스2.jpg|width=100%]]}}}|| || 난징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 || 1928년에 공식적으로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이 [[국민혁명]]을 완수하였고, 수도를 [[난징]]으로 천도하였다. 중국국민당에 집중된 권력은 그 권력의 중추였던 장제스의 권력을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청나라]]의 영역을 대부분 자국 영토라고 주장했지만 1921년 이후 독립한 [[몽골 인민 공화국]]과 아직도 잔류한 각지의 군벌들 그리고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에 설치된 사실상의 자치국이 문제로 떠올랐고, 그들의 잠재적 라이벌인 [[중국공산당]]은 [[장시성]]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우며 그들에게 맞서기에 이른다. 사실상 [[광저우]] 및 [[난징]] 일대만 장악한 국민당 정권은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 제국]]은 [[관동군]]을 동원하여 [[만주사변|만주를 장악하고]] [[만주국]]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중국국민당]]의 군대인 [[국민혁명군]]은 1931년부터 [[초공작전]]을 감행하여 공산당 소탕을 시도했고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진행된 [[제5차 초공작전]]이 주효하여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한다. 살아남은 [[마오쩌둥]]과 남은 인물들은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옌안]]을 향한 [[대장정]]에 오른다. 국민혁명군은 이들을 완전히 뿌리뽑고자 6차 초공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황금 10년(黃金十年), 또는 난징 10년(南京十年)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엔 강력한 공업화 정책과 농촌 개혁이 시작되어 장강 하류 삼각주를 중심으로 산업이 육성되었고 도로와 철도 건설을 비롯한 인프라 확충, 농민들을 위한 은행 설립, 품종 개량, 상업 작물 보급 등이 이루어졌다. 1935년에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법폐개혁]]을 단행함으로 화폐를 통일하여 재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그러나 점점 중국을 압박하며 전쟁의 불씨를 키우는 일본에 맞서는 게 먼저라는 여론이 비등했고, 회담차 방문한 [[시안시|시안]]에서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는 [[시안 사건]]이 발생하자 협상 끝에 [[국공합작]]을 선언했고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구실로 [[중일전쟁]]이 개시된다. 중국의 [[국민혁명군]]은 화북, 상하이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전술적 미숙과 장교진의 부족으로 인하여 결국 영웅적인 분투에도 불구하고 북방의 베이핑, 경제의 중심지 상하이, 수도 [[난징]], 난징 함락 이후 실질적으로 수도로 기능하던 우한과 광저우까지 함락되고, 외교적으로 전쟁을 중지할 수 있던 [[트라우트만 공작]]도 실패로 돌아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38년 [[왕징웨이]]의 [[왕징웨이 공작|배신]]으로 [[왕징웨이 정권|난징에 괴뢰 정부가 수립된다.]] 여기에 [[내몽골]]에서 [[데므치그돈로브]]가 [[몽강연합자치정부]]를 선언하면서 중국의 상황은 날로 암울해져 간다. [[충칭]]까지 수도를 옮겨갈 정도[* 이때는 수도가 난징이 아니기 때문에 '충칭 국민정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여기에 맞춰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계속 옮겨갔다.]로 망국의 위기에 처한 중화민국이었지만, 중국은 일본의 항복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고 항전을 계속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는 차후 세계질서를 운영할 강대국 중 하나로 인정받았고 만주, 타이완을 비롯한 일본 제국에게 양도된 영토의 회복을 약속받았다.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타이완 섬]]을 1945년 10월 25일 돌려받으며 중화민국 정부 최대의 --명목상--[* 사실 외몽골은 [[몽골 인민 공화국]]이 다스리고 있었고, 만주는 [[소련]]이 점령하고 있었다.] 영역을 확보했다. 내전 위기가 다시 커지자 쌍십협정으로 공산당과의 화해를 도모했지만 실패했고 미국 국무장관 마셜의 개입으로 국공 내전을 일시 정지시켰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장제스는 공산당이 중공업의 대부분과 막대한 양의 곡물을 생산하는 만주를 기반으로 재기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 전에 공산당을 멸망시키겠다는 목적으로 1946년 [[국공내전]]을 재개했다. 한편 [[중국국민당]]은 [[삼민주의]] 이념의 논리(군정→훈정→헌정)를 바탕으로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여당 / 무소속 / 직업 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한 제헌(制憲) [[국민대회]]를 1946년에 소집했으며, [[대만 헌법|중화민국 헌법]]을 반포하면서 다당제 헌정으로 전환했는데, 1947년에 여당 / 야당 / 무소속 / 직업 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해 소집한 행헌(行憲) [[국민대회]] / 행헌 [[입법원]] / 행헌 감찰원에서는 [[중국공산당]]이 참정을 거부하면서 [[중국국민당]](大) / [[중국 청년당]](中) / [[중국 민주사회당]](小)의 여대야소를 자연스럽게 연출했으니, [[장제스]]의 책략으로 3당 훈정(三黨訓政)을 형성했다. 여기서 '3당 훈정'은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 [[중국 민주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제헌 [[국민대회]]에서 [[대만 헌법|중화민국 헌법]]을 입법하면서 3당 훈정(형식적인 헌정과 실질적인 훈정)에 바탕한 중화민국 헌정의 성립을 선언했으니,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 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 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지만 그들의 표밭은 어디까지나 중국 대륙의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은 [[중국국민당]]이 주도하는 다당제 헌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거부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